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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결코 쉬운 국가가 아님을 알린 아덴만여명작전군관련이슈 2024. 12. 26. 22:53
소말리아 동아프리카에 위치한 이 나라는 국토 면적이 63만 제곱킬로미터로 남한의 6배 크기이며 인도양에서부터 홍해에 이르는 넓은 해안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지정학적 이점으로 인해 한때는 무역국가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지만, 이후 영국과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1960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하지만 소말리아는 독립 이후 제대로 된 중앙 정부가 등장하지 못하게 되면서 오랫동안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여러 부족 간 극심한 세력 경쟁이 이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소말리아가 최빈국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가 아직도 이 나라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바로 아덴만 때문입니다.
수에즈 운하를 통해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데 있어서 모든 선박은 아덴만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 규모는 1년에 2만 척이 넘으며 이것은 전 세계 물동량의 20%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수출입 규모가 커서 아덴만을 통과하는 전체 선박의 20% 가 한국 국적의 선박이기 때문에 이 지역은 우리나라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무역 항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말리아인들은 이러한 아덴만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해적 행위를 해 왔습니다. 이들은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작은 요트나 어선을 상대로 소규모 해적 행위를 해 왔는데 1990년대 이후에는 AK-47과 RPG-7등으로 무장하기 시작했고, 지역 해적들 간의 연합작전을 구사하기도 하면서 그 규모를 점차 키워나갔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선박들도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선박이 피랍되는 사건이 자주 발생하게 되었는데 1910년에는 16만 톤급 원유 운반선인 사모 드리모가 피랍되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하게 된 청해부대 이순신함은 1,500km 떨어진 삼호 드리머를 향해 출동했지만, 해적들은 한국 선원 5명과 외국인 선원 19명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하며 이순신함의 접근을 거부했습니다.결국 7개월 동안에 이러한 협상 과정이 시작되었는데 피랍자 가족들과 국내 언론사들의 비난을 이기지 못한 우리 정부는 무려 950만 달러의 비용을 지불하고 나서야 선원들을 돌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소말리아 해적들 사이에서 한국 국적의 선박은 최고의 목표물이 되었습니다.
한국 선박을 피랍하기만 하면 거액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고 해적 본인뿐만 아니라 부족 전체가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2011년 1월 15일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1만 6천 톤의 화물 제품을 싣고 스리랑카로 향하던 '삼호주얼리호'가 해적들에게 피랍되었습니다.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당시 이명박 정부는 자신은 '삼호드림호'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인근 해역에서 항해 중이던 청해부대 최영함을 급파시켰습니다. 한편, 해적들은 '삼호주얼리호'를 자신들의 항구로 끌고 가려했지만, 석해균 선장은 여러 차례 기지를 발휘해 함의 속도를 최대한 늦추었습니다.
그는 해적들에게 기관실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속여 몇 시간 동안 수리하는 척을 하기도 했고 자이로스코프를 조작해 함을 지그재그로 주행시키면서 시간을 끌기도 했습니다. 3일 후인 1월 18일 해적들은 삼호 주얼리호 부근에 몽골 선박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 선박도 피랍하려 했습니다.
해적 4명이 보트의 승선해 몽골 선박으로 접근하려는 순간 현장에 도착한 최영함은 그들을 저지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고속단정 2척과 링스 헬기가 위협사격을 하며 접근을 실시하자, 해적들은 갑자기 우리 군을 향해 조준 사격을 가해왔습니다. 이에 고속단장에 타고 있던 검문검색대장 안병주 소령 관측수 강준 하사 그리고 링스에 타고 있던 해상저격팀장 김원인 상사가 총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 측에서도 즉시 대응 사격을 실시하게 되는데 그 결과 보트에 타고 있던 해적들은 모두 바다에 빠져 실종되었습니다. 1월 21일 미 해군의 P-3C 대잠초계기가 비행을 하던 중 해적들의 모선이 '삼호주얼리호'를 향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이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판단한 최영함 함장 조영주 대령은 부산 해군작전사령부에 전투 배치가 완료되었음을 보고하였고 이명박 대통령의 허락을 받은 김관진 국방부장관은 작전의 실행을 지시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덴만 여명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UDT에 작전 1팀 8명과 작전 2팀 7명이 3척의 고속 단정에 나누어 탑승했고 곧이어 링스 헬기가 이륙했습니다. '삼호주얼리호'로 접근한 링스는 해적들이 외부와 통신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3회 레이더와 안테나의 중기관총으로 사격을 가했습니다. 또한 링스에 타고 있던 사수는 AW50 대물 저격총으로 해적 한 명을 사살했습니다.
이렇게 작전이 시작되자 해적들은 선원들을 밖으로 끌고 나와 그들을 인간 방패로 사용하려 했는데 최영함에서는 정확한 저격을 실시해 그들을 다시 선박 안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링스헬기와 최영함에서 해적들의 시선을 끌고 있는 사이 UDT 고속 단정들은 선박의 우형과 한미 쪽으로 신속히 접근했으며 사다리를 이용해 함에 승선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기관단총을 이용해 저항하는 해적들을 사살해 나가던 UDT 대원들은 가장 먼저 함의 조타실을 장악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해적 1명이 석해균 선장에게 사격을 가했습니다. UDT 대원들은 57개의 격실과 기관실 등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저항하는 해적 두 명을 추가로 사살했고 항복 의사를 보인 해적들은 현장에서 생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덴만 여명 작전이 종결되었는데 한국인 8명과 외국인 13명이 모두 구출되었고 해적들은 사망 8명 실종 4명 생포 5명입니다. 한편, 5곳의 총상을 입은 석해균 선장은 미군 헬기에 의해 오만에 위치한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며 그곳에서 응급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수술 상황이 좋지 않게 되자 아주대 이국종 교수팀이 현장으로 급파되는데 오만 병원에 의료 장비가 열악하여 환자를 한국으로 급하게 이송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에어엠블런스였습니다. 응급환자를 해외로 이송하기 위해선 전문 장비를 갖춘 에어 앰뷸런스가 필요한데 이 항공기를 급히 섭외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어렵게 스위스의 회사가 섭외되었지만 그들이 4억 원에 달하는 계약금을 요구하게 되면서 시간은 또 지체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정부의 어느 부처도 선뜻 계약금을 내주겠다고 나서지 않게 되자 이국종 교수는 개인 자격으로 자신이 직접 계약서에 서명해 항공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성남공항을 이용해 한국으로 돌아온 석해균 선장은 이국종 교수의 수술을 받고 간신히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아덴만 여명 작전에서 생포된 해적 5명은 최영함에 감금되었는데 이들의 신병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제였습니다. 해적들에 대한 처리 방안으로 처음에는 인접 국가에 인도하는 방법 우리나라로 압송하는 방법 그리고 소말리아의 훈방 조치하는 방법 등이 논의되었습니다.이에 대해 우리나라 정부는 오만 등 인접 국가에 인도하길 원했으나, 이들을 받아들이겠다고 나서는 나라가 없고 작전 과정에서 우리 측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이유를 들어 결국 우리나라로 압송하게 되었습니다. 해적들은 만 19세에서 24세의 나이였으며 직업은 군인 학생 어부 요리사 등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해외에서 발생한 피랍 사건에 대해 국내에서 형사 절차를 진행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과정 하나하나에 많은 관심과 논란이 일었습니다. 해적들에게 적용된 죄명은 해상강도상해죄 강도살인미수죄 특수 공무집행방해죄 등이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통역이었습니다. 국내에는 소말리아어를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법원에서는 호주인 선교사를 섭외하게 되는데 그가 소말리아어를 영어로 통역하면 다시 그 영어를 한국어로 통역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재판 당일 호주인 통역사가 지각을 하여 시간이 지체되었는데 이에 대해 부산구치소의 교도관이 해적들에게 재판이 지연되었으니 조용히 앉아서 기다려야 한다라고 소말리아어로 말했습니다. 이를 목격한 재판장은 호주인 통역사를 즉시 해임하고 그 교도관을 새로운 통역사로 전임했습니다.
사실 부산 구치소의 교도관들은 해적들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의사소통의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고 이에 따라 자체적으로 소말리아어를 공부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재판 과정에서 석해균 선장의 몸에 난 상처 중의 일부가 아군의 오인 사격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습니다.
석해균 선장의 몸에서 UDT 대원이 사용하는 총알이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국종 교수의 진술을 반영한 수사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석해균 선장의 몸에 난 총상 중 하나는 해적이 AK-47 소총을 직접 발사해 생긴 것이고. 나머지 총상은 UDT 대원의 총알이 다른 곳에 튕겨져 나온 유탄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결국 석해균 선장을 살해하려 한 마호메드 아라이는 무기징역 나머지 해적들에게는 12년에서 15년의 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수감 생활에 들어간 해적들은 한국의 교도소 생활에 대체로 만족했는데 음식이나 위생 측면에 있어서 소말리아 현지 생활보다는 수준이 높아 큰 불만 없이 지냈다고 합니다.석해균 선장이 교도소를 찾아 자신에게 총을 쏜 마호메드 아라이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라이는 가난 때문에 해적질을 시작했고, 그때는 그것이 잘못된 행위인지 잘 몰랐다 당신에게 총을 쏜 것에 대해 사과한다라고 말했고 석해균 선장은 그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아덴만 여명 작전은 우리 측 사망자 없이 인질을 전원 구출했다는 점에서 우리 정부의 큰 자랑거리였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점이 도출되었는데 그중에 하나는 언론사의 엠바고 위반입니다. 당시 국방부는 출입 기자단에게 작전의 진행 상황을 설명하면서도 인질들의 안전을 고려해 일정 기간 보도하는 것을 자제하는 엠바고를 요청했는데 일부 언론사들이 이를 무시하고 기사를 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방부는 그들에 대한 국방부 출입 제한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언론사들은 이것이 잘못된 조치라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국방부의 지나친 홍보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국방부는 작전 과정에서 촬영된 영상 작전에 세부 진행 절차 대원들의 사진 등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크게 홍보했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 군의 비밀 사항이 외부에 알려져 주 진행되는 작전에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아덴만 여명작전은 여러 부분에서 문제점이 도출되기도 했지만, 해외의 먼바다에서 희생자 없이 인질을 성공적으로 구출했다는 점에서 전반적으로는 성공적인 작전이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아무리 먼 거리라 하더라도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과감한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소말리아 해적들에게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결코 쉬운 국가가 아님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주었습니다.이상으로 아덴만 여명 작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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