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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박헌영을 버리고 김일성을 선택한 이유?군관련이슈 2025. 1. 9. 01:46
현재 대한민국은 분단된 국가 중 하나로 이념으로 분단된 국가로는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합니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상반된 이념과 차마 타협하지 못했던 상황 때문에 해방 후 한국은 통일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이념에 따라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됩니다.
그렇다면 한국엔 어쩌다가 공산주의가 유입되어 퍼지게 된 걸까요? 한국의 사회주의 역사에 있어 가장 먼저 등장해야 할 사람은 김알렉산드라입니다. 생소하시습니다? 김알렉산드라가 한국 최초로 공산주의를 받아들였거든요.
그녀의 풀네임은 '김알렉산드라 페트르브나 스탄케비치' 이국적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김알렉산드라는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김알렉산드라가 태어나기도 전 함경도 사람이시던 그녀의 부친 김두서는 한반도를 넘어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촌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김알렉산드라가 열살일 무렵 부친 김두서의 회사 문제로 가족은 만주로 이동하는데 이동중에 부친 김두서가 죽습니다. 아버지를 이른 나이에 여의자, 김알렉산드라는 아버지의 러시아인 친구 친구였던 표트르 스탕게비치에게 입양되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0대 학창시절을 보냈고 그의 아들과 혼인하여 슬하에 2명의 아들을 두었습니다.
김알렉산드라는 소학교의 교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우수한 외국어 실력 덕분에 통역관으로 발탁되어 우랄 지방에 파견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김알렉산드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된 임금도 지급받지 못한 한인 노동자들을 목격했고 아마 이때 김알렉산드라는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을 각성한 듯합니다.
김알렉산드라가 직접 나서 소송을 걸며 한인 노동자의 처우를 위해 힘써주었다고 합니다. 김알렉산드라는 한국어, 러시아어, 중국어 3개 국어에 능통했다고 합니다. 소송 해결 후 김알렉산드라가 우랄 노동자 동맹까지 만들자, 그녀의 명성은 금세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볼셰비키당은 그녀를 스카웃했고 러시아 극동지역 한인사회에 대한 당의 선전 작업을 맡겼습니다. 이로써 김알렉산드라는 한국인 중 최초로 공산당에 가입한 인물이 되었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김알렉산드라는 본격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 내 한인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그는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1917년 6월 고려족 중앙총회를 결성했고 1917년 7월에는 하바롭스크로 이동해 한인들을 규합하여 러시아 10월 혁명에 가담하였습니다. 레닌이 김알렉산드라를 무척 신임했다고 하며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의 총책임자는 김알렉산드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습니다.
1918년 일제의 만주 진출 야욕을 파악한 김알렉산드라는 볼셰비키의 지원하에 러시아 내 한인들을 규합해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조선인 정치 망명자 회의를 조직합니다. 그녀를 따랐던 수많은 연해주 한인들은 김알렉산드라의 지휘력에 감동했고 자연스레 사회주의자가 되었습니다.
1918년 5월 김알렉산드라는 조선인으로만 구성된 최초의 공산당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습니다. 1918년 김알렉산드라와 한인사회당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한 일본 병력과 싸우기 위해 여러 외국인들까지 귀합한 적위대를 편성하였는데 당시 내전 중이던 볼셰비키당에서는 김알렉산드라를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반면 블라디보스토크 내 백군은 일본 부대와 연합해 김알렉산드라의 적위대를 궤멸시켜 버립니다. 그로인해 김알렉산드라는 체포되었고 1918년 9월에 총살됩니다. 사형 집행 전 김알렉산드라는 여덟걸음만 걷게 해달라고 하는데 집행인이 숫자 8의 의미를 묻자 김알렉산드라는 이런 말을 했다합니다.
"비록 가보진 못했지만 우리 아버지 고향이 조선인데 팔도라고 들었다 내 한발 한발 조선에 살고 있는 인민들 노동자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새로운 사회가 실현되기를 담는다." 김알렉산드라 사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촌에서 공산당 활동이 더 이상 전개되기 어렵게 되었지만 3.1운동 직후 강한 자신감을 얻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연해주 곳곳에서 각종 공산당을 창당해 갑니다.
이들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기보다는 지역적 단위를 기반으로 하는 독립적인 공산당이었기에 점차 공산당을 하나로 통합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1920년 1월 러시아와 몽골 국경지대인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 오하묵 등이 이르쿠츠크 공산당 고려부를 조직하고 이듬해 1921년 5월에 비로소 고려 공산당을 창당하여 조선인이 만든 공산당 중 한인사회당의 적자를 표방합니다.
김철훈은 김알렉산드라와 함께 한인사회당의 창당 멤버였고 오하묵 역시 한인사회당의 핵심 간부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유의무이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철훈, 오하묵의 고려공산당을 부정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이동휘였습니다.
이동휘 역시 한인사회당 간부 출신으로 김알렉산드라 사후 이동휘는 계속 블라디보스토크에 남아서 한인사회당을 유지시키고 있었는데요. 1919년 9월 상해에 세계 임시정부들이 통합될때 이동휘는 한인사회당의 이름하에 임시정부에 합류했고 한인사회당의 당수라는 직함으로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르쿠츠크에서 한때 동료였던 김철훈, 오하묵 등이 고려 공산당을 창당한 이후 정통성을 표방하자 이동휘도 1921년 5월 같은 이름의 고려 공산당을 만들어 버립니다. 두 고려 공산당은 서로를 부정했고 사람들은 김철훈의 고려 공산당을 이르쿠츠크파 이동휘의 고려 공산당을 상해파라고 불렀습니다.
두 당파의 내분이 얼마나 심했던지 러시아 코민테른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에게 통합을 재촉했습니다. 상황은 이르쿠츠크파에게 유리하게 돌아갑니다. 러시아 코민테른은 세계의 모든 공산당이 코민테른의 일관된 지시 하에 움직일 필요가 있고 한국의 사회주의 공산당들은 이르쿠츠크파 중심으로 뭉칠 것을 요구하며 만주 블라디보스토크의 무장혁명 단체들을 전부 러시아 내부로 들어오라는 지시를 내리게 됩니다.
하필 그때 일제가 간도참변을 일으켜 간도, 만주, 연해주 일대에 군사적 행동이 난처하게 된 독립군 단체들은 러시아 내부로 향합니다. 이르쿠츠크 측에선 러시아 내부로 들어온 독립군 단체들을 전부 이르쿠츠크파의 산하 군대 '고려혁명군'에 흡수시키려고 했지만, 상해파의 공산당원과 비 공산계열 독립운동가들은 끝까지 이르쿠츠크와의 통합을 거부하며 만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에서 조직한 군부대가 대한의용군인데 이 대한의용군이 자유시에서 쉬고 있던 찰나 고려 혁명군 사람들이 러시아 측 수비대와 함께 자유시를 방문해서 무장 해제를 최종 통보합니다. 이에 대한의용군이 거절하자 이르쿠츠크파가 대한의용군을 공격해 내전이 발생하니 이 사건이 바로 1921년 6월에 일어난 '자유시참변'입니다.
이때 대한의용군의 병력은 약 1,400명이었는데 이 중 40여명이 즉사했고 450여명이 실종되었으며 나머지 360여명은 이르쿠츠크파에 가담하기를 선택했으며 나머지는 강제노동에 동원되거나 하옥되었습니다.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갈등에 넌더리가 난 러시아 코민테른은 1922년 12월 이르쿠츠크파던 상해파던 고려공산당 자체를 아예 해체 해 버렸습니다. 한편, 국내에서도 사회주의를 신봉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어엿한 단체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에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조봉암 등이 1925년 조선공산당을 창당했습니다. 조선공산당은 국내에서 조직됐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새 출발이었습니다. 국내 사회주의가 삽시간에 확 퍼지게 된 건 박헌영을 필두로 한 조선공산당의 몫이 컷고, 당시 국내에서 가장 거물급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는 박헌영이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사회주의가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퍼저 나가고 있었는데요 한국 등의 피식민국가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이 독립운동과 결부되어 있었고, 일본은 본국 내에서는 물론 한반도에서 급속도로 퍼지는 사회주의 사상을 막기 위해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무조건적으로 범죄자로 간주하는 치안유지법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 그 안에서도 수없이 많은 파벌들이 있었는데요 각 파벌들은 본인들이 원하는 단체의 행동 노선 이념 등이 모두 달라서 조선공산당은 계속 내분에 시달렸고 끊임없는 파벌 내분과 일제의 엄격한 치안 유지법에 따라 무려 4차례나 조선공산당은 해체와 결성을 반복하였습니다.
2차 조선공산당 때는 제2의 3.1운동이 될 수 있었던 6.10 만세시민운동을 기획했고 3차 조선공산당 때는 우익 세력들과 연합한 신간회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4차조선공산당 해산 이후로 5차 공산당이 형성되지는 못했으나, 그 잔여 세력들이 원산 총파업을 지원하다가 화를 입기도 했습니다.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은 사유재산제 부정 등 극단적인 이념과 투쟁으로 국민들로부터 이미지가 좋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조선공산당은 이미 내분으로 인해 4차례나 해체되고 재결성될 만큼 조직력도 끈끈하진 않았습니다.
여기에 소련 군정을 등에 업은 김일성의 빨치산파가 느닷없이 한반도 사회주의 계열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조선공산당을 옥죄어 옵니다. 러시아의 스탈린이 밝힌 바에 따르면 스탈린이 박헌영을 버리고 김일성을 선택한 이유는 박헌영은 지나칠 정도로 똑똑하고 김일성은 생각보다 멍청해서 스탈린 마음대로 김일성을 좌지우지할 수 있어서였다고 합니다.
조직을 쇄신할 필요성을 느낀 박헌영은 남조선 노동당 이른바 남로당을 결성합니다. 박헌영의 지지기반은 남한이었고 북쪽에 비해 남쪽이 사회주의 사상이 약하다는 점에서 남한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기 위해 이 남로당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박헌영과 남로당은 도저히 미 군정이 지배하는 남한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북한으로 넘어가 김일성과 함께 북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지금의 북한을 만들게 됩니다.'군관련이슈'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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