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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굴로 남한을 점령할려고 했던 북한군의 계략군관련이슈 2024. 12. 25. 23:57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인류는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을 치러왔고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전쟁의 기술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러한 전쟁 기술 중에 현재까지도 꾸준히 이어져 오는 것이 바로 땅굴입니다.땅굴은 보통 군사력이 약한 군대가 강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술로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로마군을 피하기 위해 산악 지역에 수많은 땅굴을 구축했습니다. 로마도 땅굴을 사용한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성 안에서 방어전을 수행하는 적을 굴복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로마군은 성벽 밑으로 땅굴을 구축해 지반을 약화시키고 이것을 한 번에 붕괴시켜 성벽과 함께 무너지도록 하는 전술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땅굴은 현대전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을 상대로 수많은 땅굴을 구축했는데 특히 이오지마 섬에서는 18km에 달하는 땅굴을 파고 그곳에 각종 중화기를 숨겨놓거나 여러 개의 벙커를 만들어 대항했습니다. 일본군의 이러한 땅굴 전술에 미군은 이오지마 전투에서 7천 명 이상이 전사하고 약 2만 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도 땅굴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약 250km에 땅굴을 건설하고 군수물자 보급과 병력 이동 등에 사용했는데 당시 땅굴의 규모가 매우 컸기 때문에 내부에는 전투지휘소뿐만 아니라 내무실과 탄약고 병원 등 여러 가지 형태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미군은 특히 훈련된 병사를 투입해 땅굴을 파괴하기도 했지만, 베트콩들은 파괴된 땅굴을 단기간에 복구시켜 미군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땅굴 전술이 전쟁에서 유용하다는 것이 확인되자 북한도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 군이 비무장지대 내에 경계형 철책선을 보강하자 새로운 침투 방법을 모색하던 북한은 땅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1971년 9월 25일 인민무력부 고위 간부회의에 참석한 김일성은 일명 9.25 교시를 하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의 땅굴이 핵폭탄 10개 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땅굴은 요새화된 휴전선을 극복하기 위한 최적의 수단이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북한군이 이렇게 땅굴을 굴착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전면전을 개시할 때 대규모의 병력을 신속하게 전개시켜 주요 군사 지역을 빠르게 점령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한 내에 사회 혼란이나 무장 폭동이 일어났을 경우 게릴라 부대를 침투시켜 후방을 교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땅굴 전술은 결국 우리 군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1974년 경기도 연천의 비무장지대에서 25사단 소속 수색대 9명이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땅 밑에서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수색대가 땅을 파기 시작했고, 약 46cm 아래 지하 터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북한군의 제1 땅굴입니다.
25사단 수색대가 막 땅굴을 발견한 순간 북한군이 3백여 발의 기관총 사격을 가해왔고 이로 인해 3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제1 땅굴은 폭 1m의 높이 1.2m의 크기로 벽면은 조립식 콘크리트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정도 크기면 1시간에 1개 연대 이상의 병력이 투입 가능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땅굴 내부를 수색하는 과정에서도 피해가 있었습니다. 당시 한미공동조사반 8명이 땅굴을 조사하고 있었는데, 이때 북한군이 매설한 부비트랩이 폭발하여 국군 장교 1명과 미군 장교 1명이 순직하고 6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1975년 강원도 철령군 6사단에서 경계병이 근무를 서던 중 땅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는 보고가 접수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단 차원의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땅속에 이상음은 군사분계선 남쪽에 우리 측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상음이 들리는 곳은 평강과 철원 서울을 연결하는 북한군의 주요 침투로상에 있다. 이곳은 화강암반지대여서 보강공사에 들이는 시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땅굴을 굴착하기 용이한 지역이다.
그리고 미군이 시추 작업을 하고 당시로써는 드물었던 특수 카메라를 내려보냈는데 그곳에 인공적인 동굴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렇게 북한군이 땅굴을 굴착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되자 우리 군은 현대건설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땅굴의 허리 부분을 관통하는 약 80m 길이의 역갱도 작업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5군단 공병부여단장이었던 장희성 대령은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역갱도 작업을 실시하기 위해 검토해야 할 사항들이 많았다. 우선 진입로를 만들고 작업자들을 위한 수경시설 급수시설 전기공사 등이 필요했으며 월동 준비도 철저히 해야 했다. 작업장이 북한군 gp에서 불과 1.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철책선을 새로 구축하고 연계 근무도 강화해야 했다. 3개월간의 작업 끝에 드디어 제2땅굴이 발견되었습니다."
제2땅굴은 폭 2m 높이 2m의 크기로 이 정도 규모면 시간당 2만 명 이상의 병력이 한 번에 투입될 수 있으며 중화기와 같은 무기들도 통과할 수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제2땅굴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희생자도 발생했는데 수색 과정에서 북한의 부비트랩에 의해 8명의 장병들이 전사하고 굴 내부에 차 있던 아황산 가스로 인해 7명의 작업자들이 질식사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군 지휘부에서는 이번에 발견된 땅굴이 북한군에 의해 굴착된 것임을 알리기 위해 영국 BBC의 기자를 초대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기자가 여성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작업자들은 땅굴 안에 여성이 들어오면 불행한 일이 발생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존중한 6사단장 정명환 장군은 처음에 여기자의 출입을 차단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BBC기자는 이 땅굴이 남한 측에서 뚫은 것이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했고 이에 군 지휘부는 외국인 기자에게 취재를 허용하라며 사단장을 독촉했습니다. 결국 정명환 장군은 작업자들과 경계병들을 모두 나오게 하고 대신 장교들로만 이루어진 경계부대를 새롭게 변성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자가 취재를 마치자 사단장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서양에도 13일의 금요일을 싫어하는 미신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미신이 있는데, 그것은 땅굴 안에 여성이 들어오면 불행한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수녀들이 땅굴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 작업자 7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우리의 상황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러자 BBC 기자는 그러한 사정이 있었는지 몰랐다며 매우 미안해했고 이번 북한의 남침 야욕을 반드시 전 세계에 알리겠다고 다짐해 주었다고 합니다. 1978년 판문점 남쪽 4km 지점에서 제3 땅굴이 발견되었습니다. 제3땅굴은 개성에서 시작되는 굴착 작업에 직접 참여했다는 귀순자의 증언을 기반으로 탐색이 이루어졌는데 당시 1사단장이었던 전두환 장군의 지휘 아래 약 100일 동안 역갱도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발견된 땅굴은 폭 2m 높이 2m로 제2땅굴과 비슷한 규모였으며 서울에서 불과 44km 거리에 있어 주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1990년 이번에는 강원도 양구에서 제4땅굴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전 3개의 땅굴은 모두 서부 전선에서 발견되었는데 제4땅굴을 통해 북한군이 휴전선 전 지역에서 땅굴을 굴착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제4땅굴에 대한 역갱도 작업이 실시되고 있는 사이 21사단에서는 수색팀이 편성되었습니다. 수색팀은 기본 체력 훈련 이외 특수 장비 사용 요령 화생방 대비 훈련도 동시에 진행해 이전과 같은 희생자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했습니다. 최초 11명의 수색팀이 투입되었는데 수색 중 가장 걱정이 되었던 것은 바위 밑이나 흙탕물 아래 숨겨져 있는 목함지뢰였습니다. 목함지뢰는 금속탐지기로도 발견되지 않아 사람이 직접 하나하나 확인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수색팀은 군견을 앞세우고 전진했는데 갑자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지뢰가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지휘소에서는 인명 피해가 우려되어 안전을 확인하는 무전을 계속 보냈는데 약 3분 후 전사자는 없으며 군견만 폭사한 것으로 확인된다. 라는 응답이 왔습니다.
이렇게 군견의 희생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수색대는 군사분계선 북쪽 500m까지 진출해 상황을 확인하고 안전하게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폭사한 탐지견 '헌트'는 여러 사람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인정받아 '인헌 무공 훈장'을 수여받았고 군견으로서는 최초로 소위 계급에 추서되었습니다.
제4땅굴 이후 현재까지 추가로 발견된 땅굴은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군은 땅굴이 더 존재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시추 작전과 탐사작전 청음작전 인공위성을 통한 확인 작업 등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한편, 일부 민간단체에서는 개별적인 탐사를 통하여 북한의 땅굴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몇 개의 땅굴은 이미 서울까지 진출했다는 주장도 펼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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