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러시아 파병에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와의 첫 교전 상황이 발생했는데 특수부대라고 알려졌던 북한군의 실제 전투력이 예상보다 형편없다는 사실이 드러나 또 한번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번 파병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북한이 수십년 전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을 모방하고 있다고 분석했는데요. 매체는 1964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약 32만 명의 병력을 투입해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베트남전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유일하게 승리하지 못한 전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건국 이래 250년의 짧은 역사 동안 219년이나 전쟁을 치른 미국이었지만 베트남전은 그들에게 큰 상처와 후유증을 남긴 전쟁이었습니다.
미군은 처음 베트남전에 참전할때 6개월 만에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지만, 현실은 그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습니다. 현지 상황은 미군의 생각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울창한 밀림과 험준한 지형은 미군의 작전 수행을 어렵게 만들었고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신병들로 구성된 미군은 정신적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특히 베트콩의 게릴라 전술은 미군을 더욱 곤혹스럽게 했는데 10m가 넘는 땅굴을 파고 기습을 감행하는 전술에 미군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미군은 체격이 왜소한 병사 600명을 선발해 땅굴 침투 훈련을 시켰지만 산소 부족과 정신적 압박감으로 인해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밀림 지형으로 인해 보급품 보충도 어려웠던 반면 현지 지리에 밝은 베트콩은 미군의 공중 폭격에도 불구하고 원활한 보급을 유지했습니다. 베트콩들은 주민들 사이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펼쳤고 군복이 아닌 일반 옷을 입고 있었기에 미군은 적과 민간인을 구분하기조차 어려웠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한국도 이에 응했는데요. 이는 미국이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로 평가받게 됩니다. 특히 한국이 최적의 참전국으로 기록된 이유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년밖에 되지 않아 실전 경험이 풍부한 군인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군의 참전으로 전쟁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미군과 달리 한국군은 높은 사기와 적극적인 전투 자세를 보였고 허리까지 차오르는 늪지대에서도 해가 뜰 때까지 수색을 계속하는 등 투철한 임무 수행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나아가 한국군은 미군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작전통제권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한국군을 보호하기 위한 결정이었고 미국과의 협상 끝에 작전통제권을 얻게 됩니다. 비록 구식 무기인 M1개런드 소총으로 무장했지만, 한국군은 놀라운 전투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미군이 9대 1의 사상자 교환 비율을 기록할때 한국군은 25대 1이라는 압도적인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푸캇산 전투는 한국군의 능력을 입증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미군은이 전투를 한달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한국군은 단 며칠만에 성공시켜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적의 폭격과 침입에 대비해 두세명이 들어갈 정도의 원형 구조로 호를 파고 거미줄처럼 연결한 뒤 밖으로는 철조망, 클레이모어, 지뢰등을 설치하고 안으로는 박격포, 진지, 헬기장 등을 설치해 완전 요새를 구축한 다음 1개 중대 병력으로 적군 2개 대대 병력을 격퇴하고 지역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는데요.
두코 전투 역시 엄청난 공로가 기록되었습니다. 맹호기갑연대 3대대 9중대는 열악한 무기체계에도 불구하고 현대시각으로 무장한 베트콩 2개 대대의 공격을 막아내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당시 전투에서 베트콩은 182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반면, 한국군은 단 7명의 전사자만 발생했습니다.
당시 승리로 최명신 장군이 만든 중대 전술기지 방어 개념은 미국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이후 미군 전차병들은 한국군 부대와 계속 함께하기를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짜빈동 전투는 한국해병대가 '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명성을 얻게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 2해병여단 청룡부대가 배치된 짜빈동 중대기지는 베트남 중부 꽝응아이성 내륙의 요충지였습니다. 베트콩은 피난민으로 위장해 매복 해 있었고 기습을 당한 한국군은 집중 공격을 당했습니다. 한때 3소대의 외곽 방어선이 돌파되기도 했으나, 물러서지 않고 기지내에 침투한 적을 고립시켜 섬멸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들은 1개 중대 병력으로 3개 대대 이상의 적을 섬멸하는 그야말로 신화를 만들게 되는데요. 전투가 끝나자 미 해병 3상륙 군단장인 '월드' 중장은 "이런 강하고 끈질긴 전투는 본 적이 없다. 내가 베트남전에서 처음보는 전과다." 라며 극찬했습니다.
UPI통신은 이말을 그대로 옮겨 한국해병대가 신화를 만들었다고 전 세계에 보도했습니다. 오작교 작전에서도 한국군의 용맹함이 전 세계에 드러납니다. 당시 수도사단은 꾸이뇬에 주둔하고 있었고 제9보병사단은 뚜이호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두 지역을 잇는 1번 국도는 베트남 남북을 관통하는 핵심 교통로로서 물자의 운송과 군사작전에 매우 중요한 도로였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제101공수사단이 이 1번 국도를 장악하기 위해 수많은 작전을 벌였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맹호부대와 백마부대가 각기 서로를 향해 남북으로 진격하는 방식을 통해 1번 국도를 장악하는데 성공하는데요.
이 작전은 견우와 직녀가 중간에 만나는 계획으로 오작교 작전이라고 불리며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한국군을 본 미군 장교들은 "나는 이 전투에 참여한 순간 베트콩 조차 두려워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군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들이 아군이라는 것에 감사했다.", "그들은 미군의 특수부대보다 더 뛰어난 군인들이다. 맹호부대 백마부대 청룡부대 이 이름은 내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한국군의 용맹함이 동맹군들 사이에서 이처럼 유명한 이유는 장비나 신체 조건상으로 보면 미군보다 활약이 떨어져야 정상인데 무려 더 강인하고 민첩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한국군의 활약은 동맹군뿐 아니라 베트콩 사이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요.
노획된 문서에 따르면 베트콩 지휘부는 100% 승리에 확신이 없는한 절대 한국군과 싸우지 말고 교전을 무조건 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한국군의 활약은 전투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한국군은 전투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군인이었으나 전쟁을 겪는 베트남 주민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을 진정으로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민간인과 접촉하지 말라는 미군의 반대를 뒤로하고 한국군은 민심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두고 대민 작전과 지원에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요. 참전 기간 동안 352만 여명에 대한 진료, 1만 9천여 톤의 식량 지원, 46만여 점의 의류 보급, 6천여 대의 농기구 제공, 3천여 동의 가옥 건설, 132개 교량건설, 394km의 도로건설, 90만여 명에 대한 태권도 보급 등 광범위한 민사지원을 실시했습니다.
이러한 한국의 전투력과 민사작전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한국군의 민사작전은 UN에서도 인정을 받았으며 현재까지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베트남전은 결과적으로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지만, 한국군의 활약은 세계의 한국의 군사력과 국력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보여준 뛰어난 전투력과 인도주의적 지원은 현대 한국의 발전을 이룩한 중요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비록 전쟁의 성격과 참전 결정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참전용사들의 헌신과 용기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