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허리아플때 전열보병은 왜 우스꽝스럽게 전쟁을 치뤘나? :: 영큐의밀리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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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열보병은 왜 우스꽝스럽게 전쟁을 치뤘나?
    군관련이슈 2025. 1. 13. 05:31

     

    위풍당당한 군악대의 연주에 발걸음을 맞춰 위장색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고 눈에 띄는 제복을 입은 병사들이 대형을 갖추어서 단체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적과 서로의 얼굴 표정이 보일 만큼 가까워진 다음에 이윽고 멈춰섭니다.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겁을 잔뜩 먹은 듯한 병사들 이제 서로를 겨냥하고 장교의 구령에 맞춰 총을 쏘기 시작합니다. 

     


    반대편도 마찬가지죠 근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 들지 않습니까? 이거 지금 전쟁 중이고 아무리 그래도 지금 저거 총인데 최소한 은폐나 엄폐는 해야 하는거 아닌가요? 포탄과 총탄은 빗발치듯 계속해서 날아오고 장전하는 동안에도 옆에 있는 동료가 쓰러지거나 포탄에 맞아 머리가 날아가기도 합니다. 

     

    이렇게 동료가 옆에서 죽어 나가던 말던 그들에겐 전진뿐입니다. 아니 사람 목숨을 아무리 껌값으로 생각해도 그렇지 지휘관은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저렇게 열을 맞춰서 뭉쳐있고 다 같이 상대방의 눈앞까지 가야 하는 이런 식의 전투 방식은 중세시대 전투나 고대 로마 시대 전투 방식 아닌가요? 

     




    요즘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전열보병의 전투 방식은 어찌 보면 몹시 어이없으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방식의 전투입니다. 이걸 뭐 신사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니면 멍청하다고 해야 하나요? 정말 이상하지 않을 수가 없는 전투 방식입니다. 

     


    도대체 그때의 그들은 왜 이렇게 싸웠을까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군인들이 들고 있는 저 무기를 알아보겠습니다. 군인들이 들고 있던 총은 일명 '머스킷'이라고 불리는 16세기부터 19세기에 널리 쓰였던 총기입니다. 현대 소총의 아버지라고도 할 수 있는 무기인데요. 일단 머스킷은 상당히 무겁고 길었습니다. 

     


    또한 저 당시 백병전을 상당히 자주 하였는데 백병전 같은 근접전을 대비해서 총구 앞에 검을 끼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착검을 하게 되면 거의 2m에 이르는 총기가 되었습니다. 현대식 소총과 비교를 해보면 말도 안되게 무겁고 긴 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머스킷의 장전 속도가 어마 어마하게 길었다는 거죠. 그러면 당시 많이 쓰던 '플린트락 머스킷'의 장전 과정을 차례대로 한번 설명해 보겠습니다. 

     


    첫번째 발 앞에 총을 하늘로 세워 내려놓는다. 두번째 가방에서 화약포와 탄알를 꺼낸다. 세번째 화약포를 입으로 찢는다. 네번째 화약을 총구로 집어넣는다. 다섯번째 이번에는 탄알을 총구로 집어넣는다. 여섯번째 쇠 꼬질대를 빼서 총구 안에 있는 화약과 탄알을 열심히 밀어넣는다. 일곱번째 쇠 꼬질대를 원위치한다. 여덟번째 화약 접시를 열어 나머지 화약을 집어넣는다. 아홉번째 화약 접시를 닫는다. 열 번째 마지막으로 이제 드디어 사격을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너무나도 복잡한 장전 방식은 노련한 베테랑 사수라고 해도 1분당 3발을 쐈으며 일반적인 훈련을 받은 수준의 병사들은 1분당 고작 1발에서 2발 정도 발사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던 총은 '후미식 장전총'이라고 해서 화약을 총구 뒤쪽으로 넣어서 발사하는 방식의 총들인데요.

     




    장전의 방식이 정말 사소한 차이 같지만 초 단위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전장에서 장전 방식이 간단했던 후미장전식은 아주 큰 이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거대한 총을 하늘을 보고 세워서 총구에 화약을 넣어야 하니 절대로 엎드리거나 앉아서 장전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머스킷은 날씨의 영향도 어마어마하게 받았는데요.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힘들게 재장전을 해봤자 불발되는게 부지기수였습니다. 실질적으로 머스킷이 사람 크기의 표적을 맞힐 수 있는 거리는 90m 정도였는데 탄착의 오차가 너무 심해서 대부분 30m~ 50m 내지로 접근해야지 살상 유효 거리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납으로 만들어진 탄알의 형상이 공기 역학적이지 못해서 일정 사거리를 넘어가게 되면 탄도가 완전히 제멋대로였고, 강선 등의 탄도 안전 기술이 없었기에 명중률이 현대 기준에서 보면 지독하게 나빴습니다. 

     




    또한 흑색 화약을 썼었던 머스킷의 특성상 발사를 하는 순간 자욱하게 연기가 나왔는데요. 이는 병사들의 시야를 굉장히 가렸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렇게 서로의 표정이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사격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예외가 있었으니 저격병이나 명사수의 경우 150m까지도 커버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 이제 왜 그렇게 바로 앞에서 총을 쏘는지에 대해서 알았으니 다들 왜 그렇게 붙어서 행군하고 장교의 구령에 맞춰서 다 같이 격발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전열보병은 18세기 초반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미국의 독립전쟁, 7년 전쟁, 나폴레옹 전쟁 등에서 전장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원래 이들의 '선형진'은 전열보병에 맞춰 새로 등장한 진형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전열보병은 중세시대 전투 방식과 유사하게 선형진을 계속해서 고집하게 됩니다. 전열보병이 선형진을 통해 전투를 하던 이유는, 첫째 냉병기에서 열병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였습니다. 순간적인 제압력과 화력을 위해서 한번에 많은 투사체를 발사하는 것이 고대 중세 전투로부터 내려온 상식이었기 때문에 활과 투창이 같은 방식으로 계속해서 사용되어 왔던 겁니다. 

     


    특히 당시 1분에 2~3발의 탄을 발사하고 명중률이 낮았던 머스킷 전열보병들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던 겁니다. 이러한 장전 속도의 한계 때문에 양쪽의 전열보병들이 선방 후방을 주고받은 다음에는 대부분 착검 후에 돌격하는 것이 적에게 더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마치 중세 시대의 보병전을 보는 듯한 느낌인 것 또한 과도기였던 만큼 중세시대의 기사도 정신이 아직 남아 있었기에 숨어있지 않으며 정정당당하게 적의 앞에 맞서 싸우는걸 신사적인 전투라고 여겼던 장교 및 지휘관들의 생각이 전열보병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입니다. 

     




    두번째는 기병의 위협입니다. 특히 착검이라는 개념이 없던 초창기의 전열보병들은 장창 부대와 같이 대열을 이루며 다녔는데 이는 전열 보병이 기병에게 상당히 취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재장전이 길고 근접전에 효율이 없었던 초창기의 전열 보병들은 기병의 돌격에 맛 좋은 먹잇감이 될 뿐이었고, 퇴주하는 병사들 또한 기병에게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기병의 돌격을 대비하고 막아내기 위한 전법이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방진'이었습니다. 고대의 전쟁에서부터 내려오던 방진을 만들어낸 전열보병들은 기존의 장창을 완벽하게 대체하였고 이는 대부분의 기병의 돌격과 위협으로부터 전열보병들을 지켜내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병사들의 '낮은 사기'때문이었습니다. 30m~ 50m의 유효 살상거리가 나오게 총을 쏘려면 총에 맞을 수도 있었지만, 그만큼 가까이 전진을 해야 하기도 했는데 이는 상당한 담력이 필요했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은 제식훈련을 통한 대영과 행군을 유지하기 위해 굉장히 가혹한 군기와 세뇌에 가까운 훈련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이런 훈련이 가능케 하기 위해서 '태형'이 성행했습니다. 영국군 '레드코트'들이 겉으로는 멋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태형으로 인해 죽거나 불구가 되는 비율도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채찍질 100대 정도는 기본이고 300대, 500대, 900대 형도 존재했으며 최고는 1,200대까지도 가능했습니다. 또한 18세기 초 유럽 국가의 병사들은 대부분이 하층민 출신이었는데 싸워야 할 이유가 없었던 이들은 당연히 사기가 그다지 높지 않았고 그들에게 지형을 이용해 엄폐하도록 산개 시켜 둔다면,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지휘관의 통제가 느슨해질 경우 병사들이 모두 도망쳐 부대가 와해될 가능성이 충분했었습니다. 

    현대전에 와서는 전열보병의 전투 방식이 매우 우스꽝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만약 이러한 전투 형식이 정말로 비효율적이고 비상식적이었던 것이었다면 진작에 전열보병은 사장되고 다른 패러다임이 등장했을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전열보병이 주력으로 고집되었던 것은 엄연한 이유가 있었는데요. 제2차 아편전쟁 당시 팔리교 전투에서도 청나라에 2만 5천에서 3만 명이 동원된 보병과 각각 4천명씩 8천명이었던 영불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청군은 괴멸되었고 영불연합군의 사상자는 12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 당시 이집트 원정때 프랑스군 전열보병 앞으로 달려든 맘루크의 기병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배에서 3배의 병력을 가진 6만의 맘루크 군과 그의 동맹군은 1만 8천명의 사상자를 냈고 이 전투에서 2만명의 프랑스군 전사자는 불과 29명~ 40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잘 나가던 전열보병들도 점점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데요 총기의 낮은 명중률은 '강선'과 '미니에탄'의 등장으로 느린 장전 속도는 후미장전식 소총의 등장으로 덤으로 포병의 살상력이 고폭탄의 보편화로 훨씬 올라가면서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산개대형'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19세기 후반 기관총의 등장으로 전열보병은 완벽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전열보병의 흔적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여기저기 남아있습니다. 오늘날 의장대가 하고 있는 제식은 유럽의 전열보병 재식 훈련에 영향을 받은것이고 영국의 근위대가 하는 행진이나 경계근무는 18세기 당시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이 유지 중입니다. 

     


    특히 전열보병 특유의 각 잡힌 멋은 어느 나라에서나 군인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각인되었고, 재식을 통한 집단행동은 소속 부대원 간의 유대감이나 부대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게 해줬으며 명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버릇을 몸에 익힐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군대의 열병식이나 받들어총으로 대표되는 제식 동작, 그리고 군대의 예식이 있을때 입는 정복 및 예복 등에 전열보병 시대의 흔적이 면면히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