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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의 최대 업적인 '경부고속도로'건설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인물사 2023. 2. 8. 20:25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70년은 한국현대사 특히 경제사에서 뜻깊은 해였습니다 그해 포항제철이 기공식을 열었고, 경부 고속도로가 개통됐습니다 그리고 전태일이 분신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 착공해 2년 5개월 만인 1970년 7월 7일 준공되어 오늘날까지 퇴색하지 않는 신화를 낳았습니다.
고속도로를 건설함으로써 한국경제는 오랜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 눈부신 발전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경부고속도로의 타당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초부터 이미 고속도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방문이 고속도로 건설을 결정한 가장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그 시절 대통령은 전용기가 없어 서독의 민항기 루프트한자를 일반 여행객들과 함께 타고 서독의 도시 '본'에 도착했습니다 당시의 서독에는 한국에서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이 타지에서 땀과 눈물을 흘리고 일하고 있었습니다 박 대통령 내외는 그들과 눈물의 상봉을 했는데요.
박 대통령은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서독의 경제 발전 상황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는데요 그중 가장 관심 있고 주의 깊게 관찰한 것은 서독 정부시절 건설된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이었습니다 '뤼프케 대통령'은 당시 아우토반을 독일 부흥의 상징이라고 자랑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본에서 라인강을 따라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퀼른시를 자동차로 방문했습니다 당시 자동차는 시속 160km로 달렸는데 한국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퀼른시를 왕복하는 동안 두 차례나 차에서 내려 노면 상태와 중앙분리대교차로 시설 등을 꼼꼼히 살폈습니다.
또한 안내를 담당했던 뤼프케 대통령의 의전 실장에게 독일의 고속도로를 건설하게 된 동기부터 건설 비용 관리 방법 등을 쉴새 없이 질문했고, 수첩에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에 대해 당시 전문가들이나 야당 여론은 썩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국제 부흥 개발 은행의 조사관들이 1966년에 작성한 보고서에서는 한국의 도로 사정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긴 했지만, 대규모 고속도로 건설이 필요하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습니다.
반대자들은 당시 경제 상황이나 차량 댓수를 고려할 때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시급한 과제가 아니며 재정적으로도 현명한 결정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1967년 시점에서 우리나라의 차량 댓수는 겨우 6만 대에 불과했으며 1969년까지 도로 포장률은 8%밖에 못 되는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는 '고속도로'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토목공학 같은 기술적 능력에서도 대규모 고속도로를 건설할 만한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경부 고속도로에 건설을 강행했습니다.그는 남북한이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체하고 있던 당시 상황을 이용해 경부 고속도로의 건설을 북한과의 경쟁과 남북통일에 연결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단순히 조국 근대화의 중요한 사업으로 설 뿐 아니라 북한과의 체제 경쟁 측면에서도 중요한 과업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실제로 기공식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1970년 1.21사태로 불리는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21사태는 북한의 124 군부대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정부 요인을 암살하라는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휴전선을 넘어 서울에 침투한 사건입니다 기공식이 불과 9일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발생한 사건인데다 일정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시공 일정이 결정된 이상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한 정해진 날에 차질 없이 진행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1970년 7월 7일 많은 반대와 우려를 무릅쓰고 경부 고속도로는 마침내 건설되었습니다 개통 당시에는 산업 도로가 아닌 관광 도로라는 비아냥을 들었지만, 이후 울산 구미 등지에 인근 공단들에서 본격적으로 물동량이 쏟아지면서 개통 4년 만에 화물 트럭이 전체 운행량 과반수를 점하게 되었습니다.
수도권 근교 작물 농업이 본격화된 것도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서울 등 대도시와의 차량 접근성이 좋아진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 역시 고속도로 개통으로 탄력을 받으면서 1965년까지만 해도 연간 100대 수준이던 국내 자동차 생산량은 1970년에 이미 3만대에 육박해 북한을 초월했고, 현대자동차가 포니를 론칭한 1975년에는 4만대에 육박하는 등, 탄탄대로를 달렸습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비아냥에서 '박대통령의 걸작품'으로 바뀐 것입니다 건설될 당시 한국엔 고속도로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조차도 사람들 머릿속에 잡혀 있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무도 정확하게 고속도로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고속도로에 대한 무지가 워낙 강하다 보니 재미난 일화도 많았는데요 고속도로 운영시스템이 철도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즉 IC를 철도역 같은 거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당시 '김옥현' 천안 시장은 천안 IC를 천안도심부 한가운데를 관통해 입지 좋은 곳에 설치해야 한다고 중앙정부에 강하게 요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수원에서는 고속도로가 수원 도심과 왜 떨어져 지나가냐고 수원 한가운데를 지나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갑론을박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고속도로를 가장 먼저 달린 건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라 배우 '신성일' 씨였습니다.
경부 고속도로 건설 과정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업무 추진 방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새로운 목표를 세워놓고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 집중하였습니다 특히 경제개발과 관련해서는 단계별 실행 목표를 설정하고 실무적인 부분까지 직접 기획 추진하는 목표지향적인 리더쉽을 보이고 있습니다.또한 그는 현장을 중시하는 인물로 주어진 목표를 기한 내에 달성하도록 밀어붙이기 전략을 구사하는 등 군인적 리더쉽의 특징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경부 고속도로가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은 국가 미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 이후로 미래를 내다본 국가적 투자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박 대통령처럼 10년, 20년, 뒤를 겨냥한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는 실종된 지 오래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시절의 세대가 피 땀 흘려 건설한 경부 고속도로와 같은 미래 투자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대한민국의 번영을 위해 정부에는 어떠한 사람이 필요할지 고민이 되는 시기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같은 유능한 인재가 없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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