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허리아플때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해 꼭 알아야 할 사건, :: 영큐의밀리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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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해 꼭 알아야 할 사건,
    인물사 2025. 1. 8. 15:00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조선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났는데 6살 때 부터 천자문을 다 외울 정도로 명석했습니다. 13살 때 부터 과거시험을 보기 시작했지만,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시험이 없어지자 주변인의 권유로 당시 미국인 선교사가 세웠던 근대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승만은 여기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처음 접하게 되고 영어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배우게 되는데 군주제와 신분제인 조선에서 살아온 이승만에게 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사상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승만은 영어에도 재능을 보였는데요. 6개월 만에 기초 영어를 가르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되고 2년 후에는 한국의 독립이라는 주제를 영어로 연설할 정도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당시 시대상을 고려한다면 실로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승만은 1899년 고종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며 6년간 한성 감옥에 투옥되게 되는데요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이승만은 종교를 기독교로 개종을 하면서 틈틈이 영어와 국제 정세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이승만은 여기서 다른 죄수들은 물론 간수들까지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며 많은 개화 인사들을 길러내게 됩니다. 

    1904년 이승만은 이 감옥 안에서 독립정신이란 책을 저술하게 되는데요. 이 책의 주요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나라가 강성해지기 위해선 국민들의 인식이 깨어 있어야 하고 국가는 개방을 통해 다른 나라들과 교류하고 신 문물을 받아들여야 하며 외교를 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국제 정치에서의 고립은 곧 패망의 길이란걸 이승만은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이후 한반도는 러일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혼란스러워지는데요. 고종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미국에 보낼 사절단이 필요했는데 당시 조선 일본에서 영어에 능통한 사람이 이승만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사면을 받게 되고 감옥에서 나와 1904년 11월 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승만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불과 며칠 전 이미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는 일본을 한국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그 유명한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 있었고 이로 인해 이승만은 미국까지 갔지만 그렇다 할 성과를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이때 국제정치의 중요성을 한번 더 느낀 이승만은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남아 더 공부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조지 워싱턴대학교 정치학 학사 하버드대학교 역사학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 정치학 박사 이승만은 단 5년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이와 같은 학위를 받게 되는데 이는 최소 12년 정도가 걸리는 학위 과정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공부를 마치고 이승만은 1910년 10월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는데 그때는 이미 1910년 8월에 있었던 '한일병합조약'으로 인해 한국이란 나라는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한국으로 간 이승만은 그동안 배운 내용을 기독교를 토대로 많은 한국인들에게 가르쳐주었는데 일본에서는 이 기독교를 탐탁치 않게 봤습니다. 자신들의 통치에 저항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결국 일본은 이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105인 사건'입니다. 이승만은 다행히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 상황을 모면하며 한국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결국 1912년 다시 미국으로 가게 됩니다.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두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국제 정치에서의 외교 능력을 키우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교육을 통해 한국인들의 지식 수준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하와이에서 이승만은 한국인들의 교육에 매진하기 시작합니다. 

     


    1913년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한 이승만은 이름을 한인중앙학교로 바꾸고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교육을 받을 수 있게끔 개선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관 중 최초의 남녀공학제도가 도입된 학교였습니다. 

     




    이는 당시 남성을 우선시했던 한인들의 시대상을 고려하면 굉장히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이때 한글로 된 월간지인 '태평양 잡지'를 창간하는데요. 주로 국제정세 정치사상 일제 식민통치 독립운동가들 소식 민중 계몽 등에 관한 내용을 실었습니다. 

     


    이 잡지는 하와이 미국 본토 중남미 중국 유럽 등에 배포되었는데 전 세계에 있는 한인들에게 독립운동 사상을 전파하고 많은 한인들의 계몽을 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이러한 자신의 방식대로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는데 이 과정 속에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의 많은 마찰이 있었습니다. 

    특히 싸워서 독립을 이뤄내야 한다는 무장투쟁론의 독립운동가들과 많이 부딪혔었는데 이승만은 현실적으로 고작 몇 천명 밖에 안되는 독립군이 당시 아시아의 최강 군사 강국인 일본을 이기고 독립을 쟁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국제와의 외교뿐만이 독립을 가능케 하다고 믿었던 것이죠. 이것이 이승만이 끝까지 고집했던 외교독립론입니다. 이러한 외교독립론을 바탕으로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하는 도중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 유명한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국이 참전하게 됩니다. 

     


    이후 1943년 카이로에서 미국, 영국, 중국의 정상들이 모여 대일 전략에 관한 회담을 하게 되는데 이때 나온 선언이 그 유명한 카이로 선언이 "한국이 노예적인 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념하여 한국을 적당한 시기에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만들 것을 결의한다"였습니다. 

    결국 전쟁에서 연합국에 의해 패망한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은 꿈에 그리던 독립을 맞게됩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3년 뒤인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중심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토대로 한 대한민국이 수립됩니다. 

     




    이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이 됩니다. 이때 이승만은 이미 세계의 누구보다도 빠르게 공산주의의 실체를 꿰뚫어 보고 있었는데요. 미국이 소련의 눈치를 보며 한반도에서 발을 빼려고 하자 이승만은 미국이 빠지게 되면 한반도는 공산화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미국을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1949년 6월 30일부로 주한미군이 완전히 철수하게 되는데 그로부터 딱 1년 뒤 1950년 6월 25일 이승만의 예견대로 김일성의 기습 남침으로 인해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부산 끝까지 밀려 한반도가 무력에 의해 적화통일이 되기 직전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북진 통일을 코앞까지 다가가게 되는데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해 전쟁은 엎치락뒤치락 하게 됩니다. 

    1953년 스탈린이 죽고 전쟁을 끝내자는 정전협정의 물살이 몰아치는데 이승만은 통일 없는 정전협정은 이를 악물고 반대했습니다. 공산당을 뼛속까지 알아차렸었던 이승만은 언젠간 다시 공산당이 적화통일을 위해 내려올 것이란 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이승만은 미국에게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제안했는데 미국은 협정 후 체결해 주겠다고 했지만 미국한테까지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이승만은 이 정전협정 물살에 재를 뿌려버리는 '반공포로 석방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미국은 이를 보고 이승만을 꺾을 수는 없다고 판단 결국 협정 체결 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먼저 체결해 주었습니다. 

     


    이때 이승만은 미국에게서 주한미군 주둔 국군의 현대화 경제적 원조 등 많은 약속을 받아내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계 최대의 약소국이 세계 최강의 강대국을 상대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믿지 못할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체결된 한미 동맹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한반도에 무려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평화를 지속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이승만은 자신이 태어나 죽는날까지 조국을 위해 무엇이든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다져놓은 자유 민주주의의 초석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신이 인간에게 준 자유의지를 박탈하는 공산국가는 언젠간 망할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대한민국이 공산화 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출발을 할 수 있게 해준 사람이 이승만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건국 대통령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유독 한국인만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이승만이란 인물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싶어서 자신의 인생과 모든 것을 바친 건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바쳐온 일생의 노력이 어떤 이유로든 폄훼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